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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시

봄날의 전장

봄날의 전장 - 강정

 

 

죽은 시간이 몸 안에 가득하다

불 속으로 사라진 당신은

혀끝에 남은 짧은 소리들을 부풀려 꽃들의 봉오리를 연다

온통 축축한 밤공기에 석유 타는 냄새가 배어 있다

불의 길을 따라 천천히 잦아든 몸에서

기름 섞인 피내음이 흐르고

머나먼 사막에선 전쟁이 한창이다

술 취한 시인들은 길가의 꽃들을 쪼아먹으며

허파 가득 포연을 되새김질한다

포연 속에 사라진 봄이 난간에 앉은 새들의 깃털마다 박혀있다

내 작은 집엔 생면부지의 유령들만 구구구 울어댄다

오래된 첨탑 주위에서 떠돌던 구름이

불을 뿜는 새들을 불러모아

사막의 번개를 훈장처럼 창가에 아로새긴다

남자들이 얕은 숨을 뱉으며

또다른 여자를 찾아 해메듯

전쟁을 찾아 먼 바다를 달려온 태양이

붕괴된 지평선의 모래알들을 흩뿌린다

죽지 못한 시인은 불에 구운 모래를

여전히 빗물이라 착각한다

꽃들이 공기를 연인이라 여기고

하늘이 새들의 고향 행세를 하는 게

이 낡은 별이 끝끝내 망하지 않는 명분이다

죽은 것들이 산 자를 흉내내는 봄밤

검게 입덧하며 허공에 뜬다

혀를 뽑으니 온 천지가 피 묻은 사막이다

내 안의 시인이 드디어 자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