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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시

슬픈 박모薄募

슬픈 박모薄募  심재휘

 

  가을 저녁의 해는 항상

  우리가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져버립니다

  그러면 어두워지기 전에

  사람들은 서둘러 사랑을 하고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낡은 구두를 벗고

  손자의 손을 잡은 할머니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서툴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해 지고도 잠시 더 머무는 저 빛들로

  세상은 우리의 눈을 잠시 미숙하게 하고

  낮과 밤이 늘 서로를 외면하는 이 시간이면

  강변대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흐르는 강물을

  아직은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 때

  어디론가로 무섭게 달려가는 차들을 보며

  이루지 못하였던 한때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 지고 어두워지기 전

  보이지 않는 빛을 머금고

  자꾸만 멀어져가는 저 구름들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는 졌지만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기는 세상이

  눈을 뜨거나 혹은 감아도 자꾸만

  어쩔 수 없이 환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해 지고 아주 어두워지기 전

  언제나 내 마음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박모의 머뭇거리는 밝음이 어둠보다도 더욱

  나의 시력을 아프게 할 줄 알았더라면

  해 지고 바로 어두워질 걸 그랬습니다